2016년 5월 24일 화요일

정의를 말한다 - 자연의 가르침 3권 중에서

 정의는 살아있는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인간사회에서는 정의(正義)라는 말이 존재해왔다. 인간사회를 위해서 이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 정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고, 또 정의 속에 있는 일들이 인간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종종 인간사회에서는 정의가 실종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고 또 정의가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해 왔다.

 정의는 사회를 밝히는 빛
 한 마디로 말해서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인간사회를 밝히는 빛이라고 말하면 틀리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해 온 바에 의하면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서는 온갖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고 탐관오리가 득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기와 협잡, 거짓이 난무함으로써 그 사회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사회는 부정과 부패가 없고 탐관오리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사기와 협잡, 거짓이 발을 붙이기 힘들었다. 만일 우리가 정의를 잊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 사회는 밝은 세상을 만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사회에서 정의는 필수 불가결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 정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정의를 제대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적이 없었다. 이 나라가 건국된지 50년, 그리고 이 민족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5천년의 역사 속에서 정의에 대해 토론하고 정확한 뜻을 발표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무섭다
 정의가 없는 상황 속에서는 사회를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아무리 많은 법을 제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히려 인간 사회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기현상(奇現象)을 낳게 된다는 점을 아직도 사람들은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가 없는 사회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무서운가 하는 예를 중국의 고사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 노(魯)나라시대에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깊은 산을 넘게 되었는데 인가가 없는 산 속에서 한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공자는 왜 인적이 드문 이런 곳에서 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리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동행하던 제자 자로(子路)를 보내어 사연을 알아보게 했다. 자로가 여인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혼자서 산 속에서 이토록 구슬프게 울고 있는가?” 그러자 그 여인은,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입니다. 수년 전에 저의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더니 작년에는 남편이 해를 당했고 이제는 자식까지 호랑이에게 물려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무덤을 만들어 놓고 울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자로는,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살지 않고 이 깊은 산 속에서 살다가 그런 일을 당했느냐.” 라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이 산 속에는 호랑이는 있어도 탐관오리는 없습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여러 제자들 앞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호랑이보다도 무섭다는 가르침’이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의가 제대로 지켜지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질이 높다. 따라서 부패나 부정을 찾아볼 수가 없다. 세상에는 그런 사회가 여러 곳에 있다. 반대로 이 정의가 상실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그보다 더 많이 있다.

 세상의 이치를 따라야
 우리는 우리의 사회를 볼 때마다 매우 큰 안타까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점점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그 진실을 밝히려는 자가 없고, 그 진실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 신문에는 <건국 50주년>이라는 특집이 연일 지면을 채우고 있고, 텔레비전에서는 <새로운 건국을 하자> 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프로그램들이 많이 방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구호들은 단지 그들만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세상에는 하나의 뜻이 있어서 그 뜻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고, 모든 현상은 그 뜻에 있어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뜻은 이치 속에 있는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이치는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을 제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만일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바로 서 있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만의 생각이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을 대중 앞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세상의 뜻을 거역하지 말아야 하고, 이치 속에 있는 일을 절대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정의는 있는 일을 밝히고, 인간 사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 사회를 존속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정의이다. 인간 사회에서 이 정의가 빠져버리면 아무 것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우리가 자동차를 움직일 때 그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를 빼어버리면 자동차는 있어도 제 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는 국가사회에 큰 힘을 만들어내고, 그 힘의 원동력이 되는 근본이다.
 만일 우리가 정의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우리 자신이 옳게 살겠다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사회에 정의가 무시되고 바로 서지 않는다면 좋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이 사라지게 되며 옳고 그름이 없어진 사회에서는 힘을 가진 자가 그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가 되어 버린다. 정의가 존재하고 바로 서 있는 사회에서는 통치자가 국민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정의가 없어진 사회에서는 통치자가 국민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의 법은 진실을 밝히고 진리를 밝히는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통치수단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법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능력 없는 자들이 권력에 붙어서 크게 득세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회는 점차 망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들에 대해 결코 소홀히 보아 넘겨선 안 된다.

 우리의 교육 현실과 가르침
 정의는 사회를 밝히는 빛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정의가 사라진다면 그 사회는 어둠에 덮였다고 말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어둠 속에서는 항상 꿈같은 일들만 생각하게 되고 간직하게 된다.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 무슨 교육이 제대로 될 것이며, 기업이 어떻게 제대로 될 수가 있는가? 신문과 방송에서는 50년 동안 한국의 교육은 세계에서 양적으로 제일 팽창한 나라라고 말한다. 또한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배출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졸업장을 많이 주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많은 학생을 교육해서 졸업장을 주는 과정에서 가르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있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학의 졸업장을 받고 학위를 취득했다 해서 과연 사회의 역할을 제대로 맡아서 해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있는 일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있는 일을 맡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의가 밥 먹여주느냐?, 진리가 밥 먹여주느냐?” 이런 말을 예사로 하고 있다. 어두운 곳에서 있는 일을 모른다면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삶을 우리 자신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도덕과 양심
 오늘날 매스컴을 보고 있으면 어떠한 단체, 어떠한 조직에서 ‘도덕과 양심’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한 사회에서 정의가 실종되어 버렸는데 그 사회에서 어떻게 양심을 아는 자가 있으며 도덕을 아는 자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도덕이 무엇인지, 도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는가? 이 땅에서 아무도 도덕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도덕을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회에서는 도덕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하는 말들만 한 것이지 도덕 그 자체 대해서는 누구도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국민학교 도덕 책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한산섬 앞 바다에서 싸웠다고 하는데 나라가 어려울 때 전선에 나아가 적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은 하나의 가르침은 되지만 그러나 그런 가르침으로는 도덕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서로 다르다고 알고 있으며, 철학자들에게 “철학의 정의를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 대답하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철학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에게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도덕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도덕이 무엇인지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덕을 요구 할 수가 있겠는가? 도덕은 길 도(道), 큰 덕(德)으로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 길을 만든다는 뜻이다. ‘덕’이란 무엇인가? 바로 올바른 행동을 말한다. 올바른 행동이 인간 사회에 큰 가르침을 남긴다는 뜻이다. 이것이 도덕이다. 서양 사람들은 최고의 가르침을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한국이나 중국, 즉 동양에서는 그 사랑을 도덕이라고 말한다. 서양 사람이 사랑이라고 하고, 동양 사람이 도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세계가 가지고 있는 사회 환경이나 가르침의 차이에서 오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축복하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세상에 좋은 가르침을 남긴다면 그것 또한 축복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정의(定義)도 축복이고, 도덕의 정의도 축복이다. 여기서 구별이 있다면 외국에서는 ‘5’를 ‘파이브’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5’를 ‘다섯’이라고 말한다. 용어의 차이다. ‘사랑과 도덕은 하나의 뜻을 갖고 있지만 용어는 다르다.’고 말하면 맞는 것이다.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도덕이 상실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항상 있어 왔던 일이다. 정의가 없는데 어떻게 있는 일을 바로 알 수 있고, 있는 일을 바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있는 일을 올바로 해낼 수가 있겠는가? ‘우리 인간사회에서는 正義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좋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희망인 것이다. 사회에 오히려 법은 없어도 된다. 법이 없더라도 사회 속에 정의가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양심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기, 협잡, 부정, 부패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법과 무서운 형벌을 만든다 해도 그 사회는 부정, 부패가 끊이지 않고, 탐관오리들이 득세하며, 사기, 협잡, 거짓이 판을 치게 된다. 정의가 없어진 사회에서는 옳은 사람이 큰 일을 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그릇된 자들이 그들의 생각만으로 사회를 그르쳐 버리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과거의 역사나 현재의 사회 속에서 보게 되는 일이며 미래의 어떤 사회에서도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불행은 사람들이 아직도 正義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道德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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