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4일 화요일

인과의 법 - 자연의 가르침 5권 중에서

 사람들은 세상 일들이 어떤 특정한 힘을 가진 자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어떤 정치가나 한 독재자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어렵잖게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음으로 해서 그 사회는 거기에 따르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세상의 일을 너무도 모른 채 자기 자신의 생각만을 사람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인과의 법이란, 세상의 일이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는가 하는 사실을 밝히게 되는 내용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인과의 법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또 스스로 자기를 무지 속에서 구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인과의 법이란 어떤 것인가?
 모든 일을 있게 하는 일
 인과의 법이란, 어떤 일과 어떤 것이 만남으로 해서 거기에서 나타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납과 구리를 섞었더니 다른 하나의 성질을 가진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졌다든지, 백금과 구리를 섞었더니 거기에서는 또 다른 하나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을 두고 우리는 인과의 법을 설명할 수도 있다.
 또 어떤 땅에 어떤 씨앗을 심었더니 어떤 결과가 거기에서 나왔다던가, 좋은 열매가 열렸다던가, 나쁜 열매가 열렸다던가 하는 것이 바로 인과의 법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과의 법이란 세상의 모든 일을 있게 하는, 바로 진리 속에 있던 일을 말한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에게 진리 속에 있던 일을 두고 인과의 법이라고 말하면, 실제로 진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진리 속에 있던 일을 두고 인과의 법이라고 앵무새처럼 외워서 말한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서, 인과의 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보도록 하자.
 백금과 구리를 섞어서 어떤 새로운 성질을 가진 금속을 만들어 냈다 할 때, 백금과 구리를 섞어서 만든 그 금속에는 온갖 여러 가지 성질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배합 비율에 의해서 그 성질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구리 60%와 백금 40%를 섞었을 때 나오는 새로운 금속의 성질과, 백금 60%와 구리 40%를 섞어서 나온 금속의 성질은 다르다. 즉 배합 비율에 따라 금속의 성질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과의 법은 진리 속에서 어떻게 보아야 되는가? 진리에서는 3×3은 9이다. 진리에서는 5+5는 10이다. 그런데 항상 3×3이나 5+5만 있는 것이 아니고, 4×5도 있고, 6+2도 있다. 그러니까 인과의 법은 수학의 공식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부족했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진리 속에 있는 문제를 다 해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말할 수가 있다.
 우리가 인과의 법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을 존재하게 하는가 하는, 하나의 이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이치는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수학의 공식과 같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면 수학의 공식이란 어떤 것인가? 1+1은 2이고, 10+10은 20이다. 즉 어떤 문제가 있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따른 결과는 달라진다. 이런 일을 두고 말할 때, 이런 것을 있게 하는 그것을 이치라고 한다.
 세상의 이치는 이러한 공식에 의해서 이런 일을 존재하게 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이치 속에 끝없는 일들이 존재하고, 그 끝없는 일들이 하나의 이치에 의해서 나타나고 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석가부처가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을 알려야 했던가?
 그것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앎으로 해서 그들이 무지에서 깨어나 그릇된 곳에 빠지지 않고, 그릇된 일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위험이나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서운, 영의 접촉
 이 시대의 인간세계에 많은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들어 있지 않고 이런 일들이 사람들 속에 널리 밝혀지거나 가르쳐지거나 이해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일을 두고 항상 논쟁과 투쟁,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전쟁까지 해야 했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가 있는 일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이 시대에서 인간들이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영(靈)의 접촉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들은 영의 접촉을 경계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 이 문제에 대해 걱정을 했더니 그 사람은 지금 이 시대에서 가장 빠르게 번지고, 무서운 전염병보다도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바로 영의 접촉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도 영을 경계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를 영 앞에 노출시키고 있다. 영과 접촉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에게 영이 접촉을 하게 되면 자기 상실을 가져오게 된다. 사람이 자기 상실을 하게 되면 하나의 사물을 보고 말할 때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이상한 말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영의 접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기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영의 접촉에 대해 무방비 상태일 때 그 기운은 인간의 몸이나 의식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례를 들어서 쉽게 말한다면, 1970년 이후에 세계에서 유독 한국에만 기(氣)와 단(丹)과 철학관이 우후죽순처럼 갑자기 많이 생겼다. 그 이전에는 한국에 그런 것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런데 1970년 이후에 한국에는 기를 한다, 단을 한다, 점을 친다, 사주를 보고 철학을 한다는 등의 사람들이 급격히 많아졌다. 그 중에서도 위험한 것은 철학이다. 철학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남의 사주를 보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풀어준다고 하는 사람을 말한다.
 무당에게 붙은 영들은 나쁜 것들이 별로 없다. 무당은 신(神)이 내려서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비해서, 이 사주철학하는 자들은 나쁜 영들을 모아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집어 넣는 일을 할 수도 있다.
 그 다음에 무서운 것이 기(氣)수련이다. 기 운동을 하는 곳은 귀신에게 그대로 자신의 몸을 내주고 의식을 내주는 곳이나 다름없다. 그런 곳에 오래 다니면서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면 사람의 의식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게 된다. 그 다음이 단(丹)으로서, 수련을 하면서 영들과 얼마든지 많은 접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영이 붙어 있는가 않은가를 확인해 보면 될 것이다. 사실상 영이 붙어 있다 해도 영이 붙은 것을 쉽게 알아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영을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이 매우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대상은 기와 단을 하는 사람, 사주철학을 한다고 간판을 걸어 놓은 사람들이다.
 영과 접촉한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병(病)과는 다른 무서운 현상이 있게 된다. 영의 접촉은 몸을 망치는 것은 물론이요, 몸보다도 더 중요한 의식을 망쳐놓는다. 그러니까 사람의 영혼을 망쳐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지도 못하고 있다.
 쉬운 예를 들어서, 과연 사주(四柱)가 자기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을 해보자. 1998년 4월 17일 좋은 날, 이 날에 돌감을 하나 땅에 심었다고 하자. 이 날짜에 돌감을 심었다 해서 그 돌감이 근본이 좋지 않은 열매인데도 거기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다. 땅(바탕)이 좋고 씨앗(근본)이 좋아야 거기에서 좋은 열매(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있는 일이다.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진리이다. 바로 이런 일을 진리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식을 낳고 나서 철학관에서 5만원, 10만원을 주고 이름을 짓기도 하는데, '고구마'를 '수박 고구마'라고 부른다고 해서 '고구마'가 저절로 '수박 고구마'로 변하지는 않는다.
 이름이 달라지고 좋아지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근본과 바탕이 좋아야 좋은 열매가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좋은 땅'에 '좋은 씨앗'을 심고 잘 가꾸었을 때만이 '좋은 고구마'가 나오고 '좋은 수박'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들이 인과의 법을 알게 되면 이러한 무지 속에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귀신 붙은 사주철학하는 자가 지어준 이름을 쓴다고 하면 그 악마의 사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삶 속에 있는 일
 삶 속에 있는 일이 바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만드는 길이다. 좋은 일을 찾아서 좋은 일을 하게 되면 이름도 중요하지 않고 사주도 중요하지 않다. 당연히 잘되게 되어 있고 좋은 일이 일어난다.
 좋지 않은 일을 만나서 나쁜 사람을 사귀면 항상 나쁜 일과 문제들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일이다.
 우리는 있는 일을 알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일을 배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리석고 이상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이상한 일에 휘말리면 자기를 잃고 삶의 가장 큰 축복을 스스로 저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절대로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어리석고 어리석지 않고는 있는 일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 시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영의 접촉이라고 했다. 영혼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각각 질이 다르다. 산 사람이 천태 만상의 성질을 가지고 있듯이, 영혼은 그 사람의 결정체이니까 천태 만상의 성질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의 의식과 접촉하게 되면 그 영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게 된다. 이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이중인격(二重人格), 즉 두 가지의 의식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때는 사람이 좋아 보이고, 또 어떤 때는 사악해 보이는,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시대가 위험하고 불행한 것은 사회에는 지금도 죽은 자들을 산 사람 속에 집어 넣어, 죽은 자들의 일을 하는 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제 정신을 가지고 살아도 나쁜 환경 속에서는 살아가기가 어려운데, 제 정신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대로 살아가겠는가? 그래서 이 사회에는 마찰과 불안과 온갖 불행한 일들이 그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가 사람들에게 그토록 인과의 법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무지를 일깨우고, 있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며, 세상의 있는 일을 알리기 위해 일생을 일반 사람들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을 때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나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있는 일을 말했다는 것이다. 왜 그는 일생을 돌아다니면서 그토록 말을 많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는데 자신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그것은 자기의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고 있는 일을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일반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인간의 세계에 얼마나 큰 사랑과 빛이 되는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과 국가와 개인의 운명
 세상의 어떤 일도 이 인과의 법을 통해서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모든 것은 이 법칙에 의해서 나타나고 사라지고 또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 법칙을 통해서 보면 바로 세상 자체가 창조주이다.
 세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 자체에서,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현상 속에서 계속 활동이 일어나고 그 활동으로 인해서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게 된다. 물질이 생기게 되고 생명체가 거기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에 이것이 부정된다면 이 지구는 곧 사라지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이 지구는 우리 앞에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절대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 속에 존재하고 그 법칙은 우리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의 활동에 의해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움직이고 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법칙에 의해서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왜 어려워져야 했는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회와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의 법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무지와 그 무지로 인해 존재하는 잘못된 일들이 득세함으로 해서 우리 사회에는 오늘과 같은 어려움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저마다 자기 속에 있는 근본이 결정한다.
 이 근본은 사람마다 자기 속에 있었던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 결정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마다 각각 가지고 태어나며 자기 의식 속에 있던 것을 근본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의식 속에 있는 것은 어디에서 얻는 것인가? 현실의 생활에서 얻게 된다. 현실의 생활에서 얻는다는 것은 환경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우리의 바탕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좋으면 좋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을 하기가 좋고, 사회가 나쁠 때는 나쁜 의식을 가진 자들이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이며 바로 해답이다. 있는 일에 의해서 있는 것을 존재하게 하고, 있는 것들의 활동에 의해서 끝없이 있는 일들이 생기게 된다. 있는 것은 바탕이고, 있는 일은 근본이며, 존재하는 것들의 활동에 의해서 이들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이 존재하는 것들의 활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결과를 우리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고 경험하게 되는 온갖 일들의 모든 것들이 인과의 법 속에 있던 일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과 그 생명의 근원
 인과의 법이 우리의 삶 속에서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를 이제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었다고 추측한다. 물론 이 오묘한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너무도 놀라운 현상들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이 지구 자체의 활동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자체의 활동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활동이 로케트를 만들고 달을 정복했다는 것이다.
 창조주가 로케트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달에 착륙을 한 것이다. 바로 세상의 활동에 의해서 우리 자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결론은 바로 이 하나의 진리 속에 존재하고 있다. 살아서 좋은 사람은 죽어서도 좋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무가 좋은 활동을 많이 했을 때는 그 열매 자체에도 좋은 것이 들어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한 번의 열매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세대에도 이어진다. 그 좋은 열매에서는 다시 좋은 활동이 일어날 수 있고, 다시 좋은 열매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사람이 한 번의 삶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인과의 법을 이해하게 된다면 누구든지 끝없는 자신의 삶 속에서 큰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를 말한다 - 자연의 가르침 3권 중에서

 정의는 살아있는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인간사회에서는 정의(正義)라는 말이 존재해왔다. 인간사회를 위해서 이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 정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고, 또 정의 속에 있는 일들이 인간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종종 인간사회에서는 정의가 실종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고 또 정의가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해 왔다.

 정의는 사회를 밝히는 빛
 한 마디로 말해서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인간사회를 밝히는 빛이라고 말하면 틀리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해 온 바에 의하면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서는 온갖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고 탐관오리가 득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기와 협잡, 거짓이 난무함으로써 그 사회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사회는 부정과 부패가 없고 탐관오리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사기와 협잡, 거짓이 발을 붙이기 힘들었다. 만일 우리가 정의를 잊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 사회는 밝은 세상을 만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사회에서 정의는 필수 불가결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 정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정의를 제대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적이 없었다. 이 나라가 건국된지 50년, 그리고 이 민족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5천년의 역사 속에서 정의에 대해 토론하고 정확한 뜻을 발표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무섭다
 정의가 없는 상황 속에서는 사회를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아무리 많은 법을 제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히려 인간 사회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기현상(奇現象)을 낳게 된다는 점을 아직도 사람들은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가 없는 사회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무서운가 하는 예를 중국의 고사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 노(魯)나라시대에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깊은 산을 넘게 되었는데 인가가 없는 산 속에서 한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공자는 왜 인적이 드문 이런 곳에서 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리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동행하던 제자 자로(子路)를 보내어 사연을 알아보게 했다. 자로가 여인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혼자서 산 속에서 이토록 구슬프게 울고 있는가?” 그러자 그 여인은,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입니다. 수년 전에 저의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더니 작년에는 남편이 해를 당했고 이제는 자식까지 호랑이에게 물려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무덤을 만들어 놓고 울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자로는,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살지 않고 이 깊은 산 속에서 살다가 그런 일을 당했느냐.” 라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이 산 속에는 호랑이는 있어도 탐관오리는 없습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여러 제자들 앞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호랑이보다도 무섭다는 가르침’이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의가 제대로 지켜지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질이 높다. 따라서 부패나 부정을 찾아볼 수가 없다. 세상에는 그런 사회가 여러 곳에 있다. 반대로 이 정의가 상실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그보다 더 많이 있다.

 세상의 이치를 따라야
 우리는 우리의 사회를 볼 때마다 매우 큰 안타까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점점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그 진실을 밝히려는 자가 없고, 그 진실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 신문에는 <건국 50주년>이라는 특집이 연일 지면을 채우고 있고, 텔레비전에서는 <새로운 건국을 하자> 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프로그램들이 많이 방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구호들은 단지 그들만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세상에는 하나의 뜻이 있어서 그 뜻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고, 모든 현상은 그 뜻에 있어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뜻은 이치 속에 있는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이치는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을 제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만일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바로 서 있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만의 생각이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을 대중 앞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세상의 뜻을 거역하지 말아야 하고, 이치 속에 있는 일을 절대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정의는 있는 일을 밝히고, 인간 사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 사회를 존속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정의이다. 인간 사회에서 이 정의가 빠져버리면 아무 것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우리가 자동차를 움직일 때 그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를 빼어버리면 자동차는 있어도 제 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는 국가사회에 큰 힘을 만들어내고, 그 힘의 원동력이 되는 근본이다.
 만일 우리가 정의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우리 자신이 옳게 살겠다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사회에 정의가 무시되고 바로 서지 않는다면 좋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이 사라지게 되며 옳고 그름이 없어진 사회에서는 힘을 가진 자가 그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가 되어 버린다. 정의가 존재하고 바로 서 있는 사회에서는 통치자가 국민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정의가 없어진 사회에서는 통치자가 국민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의 법은 진실을 밝히고 진리를 밝히는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통치수단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법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능력 없는 자들이 권력에 붙어서 크게 득세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회는 점차 망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들에 대해 결코 소홀히 보아 넘겨선 안 된다.

 우리의 교육 현실과 가르침
 정의는 사회를 밝히는 빛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정의가 사라진다면 그 사회는 어둠에 덮였다고 말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어둠 속에서는 항상 꿈같은 일들만 생각하게 되고 간직하게 된다.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 무슨 교육이 제대로 될 것이며, 기업이 어떻게 제대로 될 수가 있는가? 신문과 방송에서는 50년 동안 한국의 교육은 세계에서 양적으로 제일 팽창한 나라라고 말한다. 또한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배출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졸업장을 많이 주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많은 학생을 교육해서 졸업장을 주는 과정에서 가르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있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학의 졸업장을 받고 학위를 취득했다 해서 과연 사회의 역할을 제대로 맡아서 해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있는 일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있는 일을 맡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의가 밥 먹여주느냐?, 진리가 밥 먹여주느냐?” 이런 말을 예사로 하고 있다. 어두운 곳에서 있는 일을 모른다면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삶을 우리 자신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도덕과 양심
 오늘날 매스컴을 보고 있으면 어떠한 단체, 어떠한 조직에서 ‘도덕과 양심’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한 사회에서 정의가 실종되어 버렸는데 그 사회에서 어떻게 양심을 아는 자가 있으며 도덕을 아는 자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도덕이 무엇인지, 도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는가? 이 땅에서 아무도 도덕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도덕을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회에서는 도덕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하는 말들만 한 것이지 도덕 그 자체 대해서는 누구도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국민학교 도덕 책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한산섬 앞 바다에서 싸웠다고 하는데 나라가 어려울 때 전선에 나아가 적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은 하나의 가르침은 되지만 그러나 그런 가르침으로는 도덕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서로 다르다고 알고 있으며, 철학자들에게 “철학의 정의를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 대답하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철학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에게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도덕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도덕이 무엇인지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덕을 요구 할 수가 있겠는가? 도덕은 길 도(道), 큰 덕(德)으로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 길을 만든다는 뜻이다. ‘덕’이란 무엇인가? 바로 올바른 행동을 말한다. 올바른 행동이 인간 사회에 큰 가르침을 남긴다는 뜻이다. 이것이 도덕이다. 서양 사람들은 최고의 가르침을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한국이나 중국, 즉 동양에서는 그 사랑을 도덕이라고 말한다. 서양 사람이 사랑이라고 하고, 동양 사람이 도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세계가 가지고 있는 사회 환경이나 가르침의 차이에서 오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축복하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세상에 좋은 가르침을 남긴다면 그것 또한 축복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정의(定義)도 축복이고, 도덕의 정의도 축복이다. 여기서 구별이 있다면 외국에서는 ‘5’를 ‘파이브’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5’를 ‘다섯’이라고 말한다. 용어의 차이다. ‘사랑과 도덕은 하나의 뜻을 갖고 있지만 용어는 다르다.’고 말하면 맞는 것이다.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도덕이 상실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항상 있어 왔던 일이다. 정의가 없는데 어떻게 있는 일을 바로 알 수 있고, 있는 일을 바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있는 일을 올바로 해낼 수가 있겠는가? ‘우리 인간사회에서는 正義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좋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희망인 것이다. 사회에 오히려 법은 없어도 된다. 법이 없더라도 사회 속에 정의가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양심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기, 협잡, 부정, 부패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법과 무서운 형벌을 만든다 해도 그 사회는 부정, 부패가 끊이지 않고, 탐관오리들이 득세하며, 사기, 협잡, 거짓이 판을 치게 된다. 정의가 없어진 사회에서는 옳은 사람이 큰 일을 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그릇된 자들이 그들의 생각만으로 사회를 그르쳐 버리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과거의 역사나 현재의 사회 속에서 보게 되는 일이며 미래의 어떤 사회에서도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불행은 사람들이 아직도 正義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道德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업이란 - 자연의 가르침 2권 중에서

예로부터 업(業)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무엇을 두고 업이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어떤 것인가?
업이란 자신을 움직이는 근원 속에 있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이 근원 속에 있는 업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자. 이 업이란 자신 속에 있던 일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속에 있던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자기가 한 일이 자신의 의식 속에 입력이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자연을 보다 세밀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자연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든 현상은 자신 속에 있던 일을 자신의 열매 속에 전부 입력시키고 있다. 인간은 의식을 가진 하나의 주체이다. 인간은 자기가 한 일을 의식 속에 전부 입력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 의식은 영체 구실을 하고 이 영체가 죽음에 임하게 되면 인체와 분리됨으로써 독자적인 자기를 존재하게 하고 있다.


이 영체 속에 있던 의식이 사라지면 영체는 곧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의식이 사라졌다고 해서 과거에 자기에게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사라졌지만 그 속에는 자기 속에 있었던 것이 그대로 잠재해 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잠재해 있는 이 복합된 일들이 계속해서 하나의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영원히 자신 속에 있었던 일을 반복해서 지키려 하는 것이 업이며 업의 습성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존재하게 하는 뜻은 단 두 가지가 있다. 세상은 이 두 가지의 뜻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인과의 법이다. 좋아지고 나빠지는 현상은 이 인과의 법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또 하나는 윤회이다. 윤회라는 것은 모든 것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있는 것은 계속적인 반복현상을 일으키므로 해서 이런 현상이 있게 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끝없이 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도 이 법칙에 의해서 존재하고, 모든 만물이 인과의 법에 의해서 나고 죽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번 세상에 난 것은 스스로 소멸되지 않고 계속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노력한다. 우리 속에 있는 일도 그런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번 입력이 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 그 영향을 받아 활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일을 자기 속에 존재하게 했는가에 따라서 현세가 다르고 내세가 다르다. 그래서 영원히 있게 될 자신 속의 일들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은 바로 인연을 짓는 일이다. 사람이 나쁜 것과 인연을 지으면 거기에서 나쁜 것이 생기게 되고, 좋은 것과 인연을 지으면 좋은 것이 생기게 된다. 이것 또한 인과의 법이다.


'업'은 바로 인과에 의해서 자기에게 존재하게 되어 있다. 이 업이 존재하는 한, 사람은 업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자신이 아무리 잘 살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업이 큰 사람이 하는 일은 자신이 좋아지기는커녕 남까지 망치게 되고, 자신이 좋아지려고 하는 일이 항상 자기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그것은 자기 속에 좋은 근원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 속에 그런 좋은 근원이 없으니, 자기에게 좋은 일이 나타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럴 때에는 깨달음만이 자기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속에 있는 업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으며, 이것은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까 깨달음이 없이는 누구도 이런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의 법은 엄격하다. 수학에서 2+2가 1이나 5가 될 수 없듯이 진리에서도 있는 일은 불변한다.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해서 좋은 결과를 사람들에게 있도록 한 일이 60%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지해서 실수한 일이 40%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잘못된 성질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잘못된 일을 노력하면 고쳐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수를 해서 자기가 자신 속에 지어 놓은 무지의 결과인 업이 60%이고 선업이 40%이면 이 때에는 좋은 일을 하기가 매우 힘이 들다. 왜냐하면 좋은 자기보다도 더 큰 업의 힘이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가 어디에서 생기고 있는가 하면, 바로 이러한 업이 과거 자기 속에 있는 일로 인하여 생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업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는가?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일에 의해서 생기게 된다. 그러면 업은 어떻게 해서 지어지는가? 그것은 말과 행동으로 짓게 된다. 행동으로 업을 지을 수 있고 말로서도 지을 수 있다.


말로서 어떤 업을 짓게 되는가? 자기가 모르는 말을 함부로 하면 그것은 업이 된다. 거짓말은 자기를 망치고 남도 망치는 일이 된다. 이것이 바로 말로 짓는 업이다. 그래서 과거 석가모니 부처에게서 제대로 배웠던 제자들은 경전의 맨 앞에 이렇게 써놓았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라고. 부처는 깨달은 분이었기 때문에 업의 세계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설명을 했다. 그의 제자들은 자신이 들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서 혹시 부처의 말을 그릇되게 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들었다.' 라고 쓴 것이다. 제자들은 깨달은 사람도 아니어서 세상을 확실히 본 것도 아니니까 부처에게서 배운 것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확실히 모르는 것도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실제로 현실 문제를 통해 세상의 일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농사일을 잘해서 좋은 열매를 수확하여 많은 이익을 얻는 사람이 농사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농대의 교수는 이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일을 잘하는 학생들을 만들어 낸다. 왜냐? 일을 잘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람에게서 배워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서 배워야 거기서 배운 사람도 일을 잘할 수 있는 것이다.
공대의 교수가 미국의 유명한 공과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기계를 항상 다루는 곳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대학에 와서 교수 생활을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에게서 배우는 사람들이 기계를 잘 다룰 수 있고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경제를 가르치려면 다른 것은 볼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 힘든 환경과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생활에 성공하여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확인하여 그 사람을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세워 놓으면 그 교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잘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각 학교에서 수만 명의 선생이 남을 가르치고 있지만 선생이라는 사람들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자기 전공분야에서 제대로 일을 해보고 강단에 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잘못된 교육이 사람의 의식을 버려놓았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은 것이다. 결국 학교에서 업을 얻어오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업이 많고 많은 문제가 생겼다고 하겠다.


실수를 해서 자신이나 남에게 잘못된 일을 하게 된다면 그러한 실수를 우리는 악업(惡業) 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고 한 일, 무의식중에 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면 이 또한 악업이라고 말한다. 이런 일을 많이 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오게 되는가 하면, 현재와 미래에 걸쳐 끝없는 불행이 이어 진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미래에 끝없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에 대해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의식을 정밀하게 분석하면, 하나의 기체에 의식이 입력이 되어 있다. 의식이 이 기체를 움직일 때에는 이 기체 자체는 살아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사물을 보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자기 의사를 표출하게 되지만, 이 기체가 일정기간이 지나 노화되어 버리면 이 의식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왜 이 의식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같이 나타나느냐 하면, 의식에 애착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의식자체가 죽지 않으려고 계속 움직이며 활동을 하니까 살아있는 것과 꼭 같다고 하겠다. 이 기체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에는 업으로 인해서 엄청나게 혼탁해지는 것이다. 기체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의식 자체가 없어지면 이 기체 자체는 자기가 입력한 의식을 발생하는 자기 속에 있던 것을 가지고 태어나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 생명이 부활되었을 때 그 생명력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그 없어진 줄 알았던 그 의식에 의해서 나타난다. 과거의 기억을 상실했다는 것뿐이지 그 활동을 일으키는 그 근원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일에 의해서 현재가 영향을 받고, 현재의 일에 의해서 미래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 번 지어진 것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활동이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 활동도 하지 않으면 그 의식자체는 죽게 된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살아가는 물질은 있을 수 없다. 영체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영체가 곡식의 열매와 다른 것은, 몇 가지의 다른 세계와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세계라는 것은 천국과 지옥, 극락 같은 것이다.
생명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를 말하고, 사후의 세계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하며,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근원의 세계가 있다. 생명체는 이런 세계를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이 근원의 세계에 오면 아무 것도 없다. 이 세계에 가면 아무 것도 없다. 이 세계에는 신(神)도 들어갈 수가 없는 세계이다. 산 자가 해탈을 했을 때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다. 의식이 갈 수 있는 세계라 하면 그 곳은 살아있는 세계다. 그러나 근원의 세계는 살아있는 세계도 아니고 죽어있는 세계도 아니다. 이 의식이 없는 세계를 근원의 세계라 하고 태어남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세계, 그 세계에서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현세에 있었던 일로 인하여 끝없는 내세에서도 영향을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연이 업을 만들고 업이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 업이 큰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화를 낸다. 성질에 맞지 않으니까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다. 업이 중간정도인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반신반의한다. 업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들어야 기뻐한다. "바로 그것이다. 맞다! 저 가르침은 대단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업이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깨우치려하면 받아들이지도 않으니까 의심과 시비만 생긴다. 이것은 업의 활동이 커서 옳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있는 일을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서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있는 일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학벌이 높은 사람에게 배우기 보다 의식이 좋은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5백년이상 유교라는 것이 존재했다. 유교는 이상적인 학문이다. 암기만 하면 된다. 또 신학문이 들어오면서도 사람들은 암기만 잘하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고, 행정 간부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암기 잘하는 사람들은 의식이 좋아서 암기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뇌의 활동이 좋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얼마든지 하루저녁에 몇 권의 책을 읽고, 의식 속에 집어넣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시험문제를 보면 의식 속에 있는 것을 내어놓으면 된다. 그런 사람이 사법고시에 일등을 하고 행정고시에 일등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학과성적 일등을 해서 대학의 교수가 되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된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람들은 사회의 현실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엄청난 시행 착오가 존재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의 시행착오를 숨기기 위해 말을 또 만들어내게 된다. 말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업을 짓는 일이다. 자기가 모르는 말이나, 자기가 실수를 해서 거짓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말로 업을 짖는 일이다. 이 업은 항상 자기에게 대물림을 한다. 그래서 자기 속에서는 그 업의 작용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만약에 사람들이 이런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을 원한다면, 스스로 배워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전하는 일을 함으로서 선업을 지어야 한다. 축복이 되는 일은 선업이고, 남에게 피해가 되는 일은 악업이다. 악업을 짓지 말고 사랑을 배워서 행해야 옳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구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 업이라는 세계에 대해서 현실에 있는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견딜 수 없는 일들을 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되는가 하는 것을 머리에서 떨쳐버려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가르쳐도 근본이 나쁜 사람들은 잘못 살게 되어있다. 반면에 근본이 좋으면 가르쳐주지 않아도 뛰어나게 되어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항상 역사를 통해서 확인해야 한다. 역사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모든 일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일들이 반복되듯이 역사 속에 있는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역사 속에서 보면 된다.


잘 살려고 하는데도 잘 안 되는 것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왜 의지가 약한가? 업이 크니까 의지가 약한 것이다. 세상에 있는 일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인연에 의해서 존재해오고 있다. 자신 속에 있는 일이나 세상 속에 있는 모든 일이 인연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인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돌감을 만들어 냈으면 그 돌감은 계속 돌감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돌감을 세상에 있게 하는 것이고, 단감이 만들어 졌을 때는 단감이 계속 단감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계속 단감이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업이란 무엇인가?
업은 업이라고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있었던 일로 인하여 내 속에 있게 된 것으로, 내 생명의 근원에 있게 된 일들을 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내 생명 속에 있는 이 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과거로부터 나에게 있었던 일에 의해서 존재하게된 것이다.'
한번 존재한 것은 쉽게 없어지지 아니하니,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지은 업은 수백 번을 되풀이하면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업도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전생에 기생집이나 출입하고 술을 잘 먹던 사람은 현세에 태어나도 착실하게 살지 못한다. 여전히 기생집이나 출입하고 술만 먹고 다니게 된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물려받는다 해도 곧 재산을 탕진해 버리고, 곧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 결국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어야만 그 짓을 그만 두게 된다. 그런데 그것도 이번 생에서 고생을 좀 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도 다른 환경 속에서 같은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망해 버린다.


과거의 노름꾼은 현세에 와서도 도박판에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자기가 한 일 속에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항상 그 일만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전생에 그림을 잘 그리던 사람은 현세에 태어나서도 화가가 된다. 그 사람은 그림을 배우지 않아도 그림을 잘 그린다. 그런 일이 자기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제부터라도 과연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확실하게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이 업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업을 짓지 않는 일이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함으로써 자신 속에 좋은 일을 있게 하는 것이다. 내가 좋은 일을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선업을 오랫동안 행했기 때문에 악업을 억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업이 적고 선업이 커가자 그는 깨달음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선업이 큰 사람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 있어도 그것을 극복 해 나간다. 태어날 때부터 근본이 좋으면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거기에서 스스로를 윤택하게 하는 지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있는 일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크면 클수록 선업을 자기 속에 쌓을 수가 있다. 깨달음 없이 선업을 자기 속에 쌓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다.
세상의 일을 설명하려면 인과와 윤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있는 일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도 있는 일에서 생긴 것이고, 업의 근원도 있는 일에서 생긴 것이고, 윤회의 근원도 있는 일에서 생긴 것이며, 인과의 근원도 있는 일에서 생긴 것이다. 모든 일이 있는 일로부터 생기게 된다.

인생 - 자연의 가르침 1권 중에서

인생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인생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는 인생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특별히 배우려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들은 인생을 모르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
그대로 사람이 태어나서 평생을 통해 겪게 되는 하나의 과정을 인생이라고 한다.
인생이라 하면 사람인(), 날생()으로서 사람이 나서 갖게 되는 생애를 말한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니까 " 아는 아니냐." 의문을 가질 모르겠으나 막상 대학의 교수나 저명한 지식인들, 그렇지 않으면 내로라 하는 종교인들을 만나서 인생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면, 그들 역시 대답을 선뜻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나서 경험하게 되는 생애를 우리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부러지게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을 있을 같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나서 생애를 겪게 되는 과정을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것인가? 그것은 삶이다.
사람이 인생을 모른다는 것은 삶을 모른다라고 잘라서 말할 있다. 삶을 모른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이 어떤 일을 하는가? 속에 있는 일들이 어떠한 일을 있게 하는가? 인생은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삶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삶이 어떤 일을 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삶은 온갖 일을 자기 속에서 일어나게 한다.
속에 있는 일은 바로 끝없는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끝없는 자신을 만드는 길이라 하겠다. 우리는 인생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인간으로 수도 있고, 우리가 바라지 않는 불행한 자신을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생존에서 인생을 아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런데 인생을 알기가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 쉬운 입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수없이 이런 말을 해왔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자기 속에는 자기를 움직이려고 하는 하나의 성질이 있고, 성질에 따라서 어떤 사물을 보게 되고 사물에 대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척도가 각각 다른 것이다"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운명의 근원인 것이다. 사람들은 개개인이 각기 다른 운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물을 보았을 그것을 똑같이 받아들이거나 또는 똑같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운명의 근원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일은 몸은 음식을 통해서, 음식의 기운을 섭취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성장하지만, 의식은 자기 속에 있는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자기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각각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이 자기 속에 들어가서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영적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들어가면 잘못된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지고, 좋은 것이 들어가면 좋은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진다.
해답은 우리가 자연에서 있는 것과 똑같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설명할 하나의 , 법칙, 진리, 약속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소중한 일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가장 이유는 바로 거짓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음은 바로 거짓이 진리를 가려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마디로 말해서 인생에 대해서 모르고 사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사는 것과 같다.
자신을 구할 있는 가장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말은 성경에도 나와 있다.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것은 결국 자신 속에 있던 일들이 자신을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예수의 설명이었다.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 속에 있는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일은 인연을 통해서 오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스스로 자기가 지은 업보(業報) 공덕(功德)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간단한 보기를 하나 들어보겠다. 어떤 사람이 작물을 재배하는 법을 알아가지고 좋은 열매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고 하자. 이것은 있는 일을 바로 앎으로써 가능케 일이다.
다시 하나의 보기로 설명을 해보자. 텔레비전에서 농사 정보를 방영하는데 산지(山地) 이용해서 산삼을 키우고 더덕을 키우고 백약이란 약초를 키워서 상당한 소득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바로 있는 일을 통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니까 산에는 원래 백약이나 산삼이나 더덕이 나지 않았지만, 농사꾼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능력을 이용해서 산에다 그러한 작물을 재배하게 것이다. 산에서 산삼이 나게 것은 어떤 사람과의 인연에 의해서 산삼이 나게 되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어떻게 자신이 살아갈 있는가?'라는 원리를 알아내는 일이야말로 우리 생애에 가장 소중한 일이 된다고 본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은 하나의 흐르는 물처럼 어떤 힘에 의해서 움직이다가 결국 멈추게 밖에 없다.
아무도 가꾸어 주지 않는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릴 있다는 보장은 누구도 없다. 아무도 가꾸지 않는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린다는 것은 기대할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인생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무도 가꾸지 아니한 버려진 곳에 있는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일은 매우 어렵다고 하겠다. 그래서 인생을 모른다는 것은 자기를 어떻게 살게 해야 것인가를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를 모른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를 버리고 산다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고 말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기가 살아야 하는지 이유에 대해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인생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면,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도움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불완전한 것은 사람들이 인생을 모르므로 함부로 날뛰고 함부로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기가 일이 자기에게 존재하게 되고 일로 인해서 끝없는 세월을 두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누구나 쉽게 함부로 아무 일이나 해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누구든지 이런 일을 모른다면 아무 일이나 함부로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일을 모르면 사람을 잘못되게 하고 세상을 잘못되게 하는 원인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일은 이렇게 해서 끝나지 않는다. 자기가 저지른 일은 항상 자기 속에 있어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서는 "항상 자기 속에 있는 일은 항상 자신 속에서 자신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는 것이 정답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알지 못한다면 누구도 삶이 스스로에 의해서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깨달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있는 일을 바로 알아야 다른 일을 제대로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세계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 속에 있던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어떤 영향을 자기에게 미치게 되는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살게 되면 사람들에게서 일어날 있는 일은 실수 투성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이런 일을 제대로 모르고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하나의 애착이나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원인에 의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있다.
인생을 아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다. 인생을 바로 알면 세상을 바로 이해할 수가 있다.
옛날, 중국의 유명한 학자는, "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 했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세상의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변화하는지에 대한 인과의 법을 말한다. "있는 일을 바로 알게 되면 있게 되는 일도 바로 알게 된다" 말이다. 말은 우리에게 매우 깨달음을 주는 말이다.
있는 일을 바로 알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며,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원리를 깨닫게 된다면, 그런 일에 눈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서 이는 삶의 중요성을 말한 것으로 매우 현명한 자의 말이라고 있다. , 내가 세상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세상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아는 것은 나를 얻는 길이다. 인생을 아는 것은 자신을 평화와 행복과 영생과 부활과 그리고 극락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인생에 대한 가르침은 어떠한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셈이다.
만일 우리가 인생을 소홀히 생각하고 인생을 아무렇게나 생각한다면 사람은 자기의 모든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미래를 포기하고 어떻게 복받기를 원하며, 어떻게 잘살기를 원하는 것인지 이해할 없다.
만일 어떤 자가 무지한 생각에 옳지 않은 일을 해서 재물을 모았다고 한다면 재물은 오히려 사람을 더욱 괴롭히게 된다고 있다. 재물이 원인이 되어서 온갖 시비와 불행이 끝없이 일어나게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있는 일을 보지 못하고 짧은 안목에서 잠시의 배고픔이 두려워서 옳지 않은 생각을 가졌을 , 사람은 그러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도는 과연 무엇일까?
인생의 도는 자기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모든 원인을 말한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을 아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하는 길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을 수가 있다. 인생을 모른다면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를 모르는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인간의 세계가 소중한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일은 시대가 깨달아야 하는 가장 불행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인간 세계에 온갖 위선과 거짓, 시비와 잡음이 끊일 날이 없는 것은 목적이 없는 ,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삶으로 인하여 생기게 되는 현상들이다.
우리가 삶이 어렵더라도 참고 견디고 이기고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나의 앞길이 인생의 과정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앞길이 인생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인생은 누구에게나 포기할 없는 중요한 것이라고 설명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삶이 힘들더라도 살아야 하는가? 중도에 죽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는 데까지 살면서 어떻게 하더라도 좋은 인연을 짓고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속에 인생이 걸려 있고, 인생 속에 나의 미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 살기가 어렵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는다면, 사람은 그로 인해서 좋은 인연들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다음에 인간으로 태어나면 허약한 사람이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버리는 일은 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무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불행한 일들이라고 밖에 설명을 없다.
삶의 도는 바로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되며, 인생은 삶으로부터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이러한 일을 아무렇게나 생각한다면 그것은 희망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과 같다.
속에 있는 일을 하나라도 바로 이해하는 일은 자기의 인생에 매우 좋은 영향을 주는 원인이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돈을 기부하고 열심히 기도를 한다 해도 일이 사람의 앞길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람이 알아야 일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자기를 위하는 일은 자기 속에 있게 일들을 좋은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있게 하는 일이고, 그런 일을 바로 알아서 자기의 삶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섬기는 일이며 자기를 복되게 하는 일이 된다.
글을 통해서 인생이 어떠하다고 하는 설명이 사람마다 마음에 쉽게 닿지 않을 것이다. 각자가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부정하건 부정하지 않건, 그것은 상관이 없다. 진리란 있는 일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는 현상 자체를 말한다.
각자가 부정하건 부정하지 않건, 하나의 뜻이 분명히 어떤 일이 되도록 되어 있으면 일은 되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으로 인생을 알고 싶다고 있게 되는 일도 아니고 인생이 좋아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인생을 좋게 만들 있는 가르침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사람은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 속에서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모델을 만들어 놓고 살펴보아야 하겠다. 하나의 작물은 땅과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활발히 활동을 하고, 결과로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 인간의 의식도 똑같다.
주변에서 얻은 자기가 가진 지식과 깨달음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인간의 의식은 활발한 활동을 있고 좋은 자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자기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를 해치는 일을 하지 않으니까 자연적으로 좋아질 수가 있다.
우리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작물이 있는 곳에 석유기름을 부어 버렸다면, 땅은 타버리게 되고, 작물은 그로 인해서 메마르게 된다.
우리가 어떤 과정에서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일들과 인연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로 인해서 작물과 같이 우리의 의식도 시들고 망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인생은 바로 삶이요, 인생의 ()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살게 하느냐 하는 숙제이다. 숙제는 남이 가르쳐 주지 않는, 스스로 풀어야 하는 숙제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이런 숙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숙제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풀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문제이다.
사람들은 다른 어떤 대상에 의해서 자기가 좋아진다거나, 자기에게 좋은 열매를 얻어준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만일 사람들이 귀신을 섬겨서 자기들이 이해할 없었던 어떤 이익을 얻었다면 그들은 일로 인해서 손실을 보게 것이다.
왜냐하면 매일 기도나 하고, 있는 일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결과 하나의 무지를 얻게 되는 것이고 무지가 자기를 망하게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이라는 어떤 대상에 의해서 자기들의 일이 잘되고 잘못된다 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사실 우리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신이 인간을 부활하게 하고, 인간을 천국에 가게 하고, 인간을 깨닫게 일은 극히 드물었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를 아직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잊지 말아야 하는 일은 바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결실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항상 있는 일을 관찰하고 있는 일에 비추어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실을 가져오는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인생을 알면 아는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길을 알면 바랄 것이 없다. 항상 열심히 일하고, 자기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일을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잘살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런 일에 대해서 상세하게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인생을 아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이런 일을 밝히는 것이 옳은 일인지, 밝히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하나의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연은 본인이 모르는 속에서도 지어질 있는 것이고, 본인이 아는 상태에서도 지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인생을 버리고 사는 일이 정도(正道)처럼 되어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인생을 아는 것이 축복이 되기도 하지만,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많은 고뇌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 사람은 아들이다, 딸이다"라는 식의 애착을 가지고 있는데, 애착이 자녀를 잘못되게 하고, 형제를 잘못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자식은 자식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이 있고 좋은 뜻이 있으면 먼저 자신이 알아야 하고, 자신이 알게 되면 그것을 자식에게 가르치면 된다.
"아버지는 이런 일을 알게 되었으니, 너도 이런 일을 확인을 해보고 배우게 되면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좋은 결실을 가져오게 것이다"라고 가르치면 된다.
가르치지는 않고 바라기만 하는 자체가 잘못이다. 바라는 일이 있을 경우 자신이 알고 가르치면 자기가 바라는 일을 자식이 스스로 것인데, 가르치지도 않고 바라기만 하니까 이는 안될 일을 요구하는 것과 똑같다.
"모르는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그런 일을 바란다면 당신이 먼저 배우고 가르쳐라. 그래서 사람들이 있는 일을 알면 있는 일을 쉽게 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모르니까 못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항상 사람들에게 "애착이 우리의 삶에 걸림돌이 때가 있다"라고 말한다. 말을 두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모와 자식간에 의를 갈라 놓으려고 한다고 했다.
말은 사람들이 부모와 자녀와 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은 하되 절대 애착은 갖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면 애착은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인가?' '애착이란 무조건 자기의 마음을 어떤 것에 얽매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애착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봐도 거짓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축복으로부터 시작된다. 잘되게 하는 것은 축복이고 잘못되게 하는 것은 애착이다. 사람들은 애착과 축복을 구분하지 못하고, 애착이 축복인 알고, 사랑이 애착인 안다. 이렇게 거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장 사랑은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가? 자기가 가르칠 없는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서 배워 오게 하기 위해서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학교에 보내는 것은 사랑이다. 가르치는 것은 사랑이다.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자식이 배움을 통해서 축복을 얻게 하려 하는 의도에서다.
우리가 인생을 배우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과 애착을 구분할 아는 것이 이를 이해하는 길이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공부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바로 공부 자체가 사랑이다. 그래서 인생은 깨달아야 하고 깨달음을 위해서 인생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일을 아무렇게나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희망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희망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희망은 우리가 가꾸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지 않고 우리가 가꾸지 않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깨달음이 필요하고 배움이 필요한 것이다.
배움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인생이요, 인생을 모른다면 누구도 사랑을 배울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있다.
학력이 없더라도 인생을 배우면 사람은 훌륭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아무리 많은 학력을 소지한다 해도 인생을 모르는데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중요한 일은 사람들은 항상 자기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고, 끝없는 내세를 위하여 빛나는 밝은 삶을 자기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신념을 갖는 일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이라도 인생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으면, 사람은 절대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 속에 있게 되며, 모든 원인이 결과를 만들게 된다' 한다면, 누구도 자기의 행동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내릴 있는 해답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이제 무엇이 애착이며, 무엇이 사랑인가를 구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자식이 일등을 해야 한다면 일등을 하도록 가르쳐라. 그것이 사랑이 아니겠는가? 가르치지도 않고 일등을 하라고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의 무지라 하겠다.
그래서 인생을 이해하는데는 사랑과 애착에 대해서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을 하고 끝을 맺는다.